생산적 글쓰기

죽고싶은 사람과 죽고싶지 않은 사람

죽고 싶은 사람과 죽고 싶지 않은 사람

 

죽음과 삶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다루기엔 일천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이 글에 한계가 많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그냥 지금까지 일하면서 느낀점, 드는 생각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최근에 내가 일하는 곳의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번개탄을 피워 자살시도 한다는 주위의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달려갔고, 우리 직원들도 호출되었다.

빚이 많다고 한다.

이혼을 했다고 하고 자신을 챙겨줄 가족들도 없다고 한다.

자식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단절된지 오래라고 한다.

겨우 일하고 있지만, 그 월급도 사채에서 쓸어가고 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살아가야 할 이유의 부재 뿐이라고 한다.

아마 심한 박탈감과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경찰에 의해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언니와 다투고 홧김에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람은 단골손님이다.

한 사람은 그가 가진 재산을 정리해야만 지역사회에서 법적으로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것을 놓지 않고, 국가적인 도움만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구가 여러 가지 법적 제한 때문에 들어주지 못하면 마치 어린아이들이 보채듯이 자신의 목숨을 무기삼아 소위 밀당을 한다.

어떤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질환을 호소했지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부모에게 말했을 때, 모는 소녀와 함께 울산에서 가장 긴 다리로 갔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거한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살은 먼 나라의 얘기일 수 있고, 아니면 가까이 있지만 감추고 싶은 가족사, 개인사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흔하게 보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감추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어 판도라의 상자를 오픈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감추려는 이유나 입을 열려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은 자살시도자들에 대한 아주 짧은 단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가 생존의 욕구이다.

다른 많은 생명체들도 생존을 기본적 욕구로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인간에만 국한하겠다.

진화론적 관점으로 봤을 때, 인간은 어떠한 환경, 어떠한 상황에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적응하여 왔다.

그 증거로 가장 나약한 존재에서 지구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정말 강인한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눈으로 보면 인간은 정말 나약한 존재이다.

누구나 같은 능력, 같은 힘, 같은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때문에 강인한 존재와 나약한 존재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나약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죽고 싶어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죽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힘든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럴때마다 모두 죽으려고 할까?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힘든 일이 고통으로 다가오고,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들이 남들보다는 조금 작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일반적 관점으로 그저 힘내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선의 힘으로 자살을 고민하면서 살아가는데 에너지를 다 쏟고 있기 때문에.. 다른 여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에너지는 자신이 경험하는 상황 혹은 현실적 고통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고, 영원히 힘들거라는 절망감을 인지하게 되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마저도 영원할 것이고,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면 자살을 계획하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인가?

언제 죽을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고 실제로 자료를 모은다.

어느 정도 방법이 정해지면 그들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올렸던 SNS의 글이나 사진들을 모두 지우거나 혹은 절망의 글들로 채워나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친했던 사람들에게 술 한잔 하자, 혹은 밥한끼 먹자, 한번 만나자, 커피 한잔 하자 등으로 연락을 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렇게 고마웠던 사람들,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먼 여행을 떠날 것처럼 인사를 하고 뒤돌아선다.

어떤 아이는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평소 잘 먹지 못하던 밥도 잘 먹고, 수업시간에 질문도 하고, 친구들과 얘기도 많이 한다. 그리고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기 서너달 전부터 병원 쇼핑을 하기도 한다.

어떤 노인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온다.

그 밖에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러 다니는 사람도 있다.

유서를 쓰기도 하고, 짧은 편지를 쓰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문자메시지로 이별을 고한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면 그들은 죽음의 열차를 탄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살고 싶다는 마음속의 외침을 남기면서.....

 

자신의 목숨을 무기로 삼는 이들은 실수로 사망하기도 한다.

손목을 그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깊이 그었다거나, 목을 맸는데 다른 날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거나, 혹은 자신을 도와줄 이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거나.

때로는안녕! 고마웠어.’라는 말을 통해 어서 와서 나를 도와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자신의 마지막 인사가 무시당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더욱 치명적이 된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행동들은 중독이 된다.

 

카우치에 누워서 – 어빈 D 얄롬

[죽은 것처럼 느껴지면 내가 살아 있음을 알기 위해 나는 자해를 한다.

죽은 것처럼 느껴지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는 위험한 일을 한다.

공허하게 느껴지면 나는 약물로, 음식으로, 정액으로 나를 채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다. 나는 수침에 싸이게 되고, 더욱 더 죽은 것처럼 느끼게 되고, 더욱 더 공허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또 다시 자해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처럼 자해를, 자살시도를 습관처럼 한다.

죽은 것처럼 느껴지면....

하지만 이들도 누구보다 살기를 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죽음충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르키소스다.

누구의 손길도 미치지 않은 깨끗한 숲 속에 맑은 샘이 있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다녀간 적이 없고, 나뭇잎조차도 이 샘 위에 떨어진 적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인 곳이다. 사냥을 하다 지친 나르키소스는 더위를 식히고자 이 샘으로 온다. 갈증을 느낀 나르키소스는 샘물에 몸을 숙였고, 그 순간 물에 비친 형상을 보고 흠칫 놀란다. 그는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넋을 잃고 꼼짝하지 못한다. 조각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경탄한다. 지금까지 많은 인간, 요정, 신들의 사랑을 거절해온 나르키소스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는 연인을 갈망하듯 자기 자신을 뜨겁게 열망한다.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수없이 입을 맞추고, 자기 자신을 껴안고자 두 손을 담그지만 그럴 때마다 물속의 형상은 흐려지고 만다. 그는 실체가 없는 대상을 사랑하며, 자신을 피하는 거짓 실체에 비참함을 느낀다. 나르키소스는 눈물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사라지는 자신의 형상에 애가 타고, 자신의 그림자에게 제발 자신의 눈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자신의 슬픈 망상을 보듬어 달라고 울부짓는다. 결국 그는 자신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샘에 빠져 죽는다. 그가 죽은 자리에 중심부가 눈처럼 하얀 꽃잎에 둘러싸인 노란 작은 꽃(수선화)가 피어났다.”

나르시시즘은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다시 정리하면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몸을 마치 성적 대상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의 태도, 말하자면 스스로 성적 만족을 느낄 때까지,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쓰다듬고, 애무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의미한다. 신경증을 다루는 리비도 이론의 틀 속에서, 정상과 질병 사이의 차이는 양적 차이에 불과하듯, 나르시시즘과 정상 사이에도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만이 존재한다. 프로이트는나르시시즘은 성도착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어느 정도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자기보존충동이라는 이기주의를 리비도가 보충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적에너지인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면 극도의 쾌락을 위해 죽음을 시도한다.

그 예로 정사를 할 때 목을 조르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여자든 남자든 정사 도중 둘 중 하나는 혹은 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면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까지 버틴다. 상대를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행동들은 아니다. 쾌락의 추구함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잘 못 시행하게 되면 쾌락을 대신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혹은 우리가 목을 매달아서 자살을 할 때, 침이 흐르고, 분비물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남자의 경우는 정액도 쏟아낸다.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극도의 쾌락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絞死)가 나르시시즘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정신생활 및 신경생활 전반의 지배적인 경향은 자극에서 비롯된 내적 긴장을 줄이거나,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스트레스로 인한 내적 긴장을 원래의 일상 상태로 되돌리는 것- 혹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바바라 로는 열반원칙이라고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쾌락 원칙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죽음충동의 존재를 믿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이다.

참고 : 이 부분은 자살을 죽음충동과 나르시시즘적인 해석을 위해 프로이트의 분석을 일부 가져온 개인적인 분석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웨이랜드 사의 회장은 거대한 우주 연구에 엄청난 돈을 투자할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늙었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엔지니어에게 원했던 것은, 그들()처럼 영생을 사는 것이다. 죽지 않는 비밀을....

이처럼 우리는 오래 살기를 원한다. 불로불사를 원했던 진시황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기도 했지만, 오래오래 살고 싶어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도 수없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영역에 접근할 수 없다.

정말로 신의 영역으로 가고자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만이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 죽지 않았기에 어떠할지 모른다라는 말로 말을 줄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싶어하고,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살고 싶어한다.

죽고 싶어하는 자들은 정말로 죽고 싶을까?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에게 주어진 생명의 초가 꺼질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하는가?

어쩌면 판단은 그의 몫이다.

주변의 우리들은 그가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그를 챙겨주고, 힘을 내도록 도와줄 뿐.... 그의 목숨에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래서 살인죄가 무거운 것 아닐까?

인간들이 감히 판단해서는 안될 금단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그리고 죽고싶은 것과 죽고싶지 않은 것,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공존하고 있고, 우리의 마음 속에는 죽고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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