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글쓰기

윤회의 계단

=스크롤 압박 있습니다. =


“허억!”

갑자기 눈을 번쩍 뜬 효성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마치 무언가에 놀란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는 못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은 보좌관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건만, 까무륵 잠이 든 사이에 눈을 뜬 곳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너무 고요하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지? 이봐! 김보좌관! 김보좌관 어디에 있나?”

메마른 입술을 들썩이며 보좌관을 연신 찾아댄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되지 못하고, 무심하게 허공속으로 사라져간다. 마치 모든 소리를 다 흡수해버리는 흡음벽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이 찾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효성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70여년을 살아온 그인지라 재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효성은 자신이 있는 공간이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먼 곳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뿌연 안개 너머에 누군가 있을까?”

무작정 걸음을 옮기려했지만, 그의 발은 마치 강한 접착제에 붙여 놓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눈을 떴을 때처럼 몸도 가볍지 않았다. 

순간, 겁이 덜컥났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누가 나와서 말 좀 해 봐..”ㅣ 

효성은 소리쳤지만, 사방으로 퍼지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마치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새처럼 푹 꼬꾸라지는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의 눈 앞쪽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해가 지는 노을 속 마을이 보였다. 


아주 오래되고, 오래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느 작은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치 영화 속 카메라가 줌인을 하는 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집이 갑자기 눈 앞으로 쭈욱 당겨졌다. 

효성 자신의 몸은 움직여 지지 않는데, 그의 눈과 마음은 집안으로 성큼 성큼 들어가더니 안을 보여준다. 



궁벽한 살림살이가 가난을 대변하는 것 같은 부엌 속에 있다. 부엌엔 안방으로 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열린채 있다. 그리고 방안에는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 하나가 머리만 돌린채,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젊은 여인의 뒷태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다. 

강제적으로 보여지는 이 장면으로 인해 잠시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내 그 장면이 익숙함을 느끼는 효성이다. 저녁상을 준비하는 여인이 고개를 돌려 강보의 아이와 눈을 마주치자, 아이는 이내 까르르 웃는다. 여인의 모습을 본 순간, 효성은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성장해서 살아가는 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낸 한없이 불러도 그립고 그리운 그 말.

‘어머니.’

여인은 바로 젊은날의 효성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저렇게 젊은채로 나타나다니...’

불러보고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좀 전까지 잘도 소리쳤건만, 입술이 고장난 것인지,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답답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

   

갑자기 효성의 입이 열리면서 하! 소리와 함께 깊은 한숨이 나온다. 

그러자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던 모든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 만의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현실로 돌아온 효성의 눈 앞에 어디까지가 그 높이인지, 어디까지가 그 길이인지 알 수 없는 검은 벽이 길게 뻗어 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러나 효성은 놀라지 않았다.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자신은 계속 이 자리에 있던 것 같은 익숙한 느낌만 든다. 

벽은 높고 길어 그냥 검은색 공간에 빠져있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검은색 공간이 벽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발견한 하얀색 문 덕분이다. 지금까지 많은 문을 지나치고, 혹은 보기도 하고, 넘나들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큰 문은 처음 본다.

그래도 문은 그 끝이 효성의 눈에 담을 수 있어서 높이를 가늠하기엔 가능했다. 

‘한 50미터 정도 되겠군.’

젊을때부터 시작한 건설업으로 높이 등은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효성에게 건축이라는 것은 경험으로나 경력으로도 익숙한 것이다.  


효성은 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절염으로 쑤시던 오른쪽 무릎이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힘겨운 내디딤이 아닌, 아주 가볍고 경쾌한 기분마저 들어 효성은 걸음의 폭을 크게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걷기에는 괜찮은 것 같군. 마치 30년은 젊어진 느낌이야.’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 무릎을 확인하기 위해 내려다보다 갑자기 주름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오오!!!”

“오오오오옷!! 이렇게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대리석이라니....”

효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리석으로 된 길바닥을 만져 본다.

먼지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은 마치 거울처럼 빛이 났다.

끊임없는 감탄이 효성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걸 수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최고의 가격을 받을 수 있을거야. 아..... 여기는 어떤 곳이길래 이런 고급스러운 재료들로 복도바닥을 만든 거지? 이런 대리석을 내 사무실에 깔아놓으면 다른 의원들이 부러워하겠지?”

국내 굴지의 건설사 명예회장임과 동시에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있는 그였기에 자신의 사무실에도 깔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의원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효성은 수분기 없는 자신의 거친 손을 들어 검은 벽을 더듬고 쓰다듬어 보았다. 

몇 차례 벽을 더듬던 효성의 주름진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오! 이럴수가... 이럴수가.... 이것은.... 이 벽은 모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효성은 호흡을 가다듬고, 감탄했다.

“이것은 잘 가공된 블랙다이아몬드... 이 벽 전체가 모두 다이아몬드라니... 이럴 수가.... 이것은 정말이지... 엄청난데... 이것만 가져가면 난 엄청난 부자에다가 대통령도 될 수 있어. 하하하!”

끊임없이 감탄사를 연발하던 효성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것은 탐욕의 눈빛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적당한 연장을 찾지 못했고, 주변에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것이다. 잠시 고심하던 효성은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뒷 굽으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블랙다이아몬드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어서인 것 같다. 

하지만 효성의 행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벽은 어떠한 흠집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구두 뒷 굽으로 벽을 내려칠 때 마다 효성의 늙은 손에 강한 아픔만 전달된다. 하지만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이 것의 아주 일부만 있어도 난 부자야...”

중얼거리면서 몇 차례 더 두드려댔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결국 힘이 빠져버리고만 효성은 입맛만 몇번 다시며 구두를 신었다.  

‘벽 자체인 다이아몬드는 별로 쓸모가 없어.’

합리화를 했지만 효성은 여전히 아쉬움의 눈빛을 가진 채 잠시 동안 벽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이끌리듯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옮기던 중, 효성은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 도대체 블랙다이아몬드와 최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는 이곳이 어딘지 의문이 든다. 얼마 전까지 자신은 보좌관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주변에 있어야 할 보좌관과 기사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자동차도 없다. 이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눈 앞에 보이는 문으로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효성은 곧 반투명한 흰색이 가득한 문 앞에 도착한다.

슬쩍 눈을 문 가까이에 대고 문 너머를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문은 어떤 보석일까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문은 평범한 반투명의 두꺼운 유리문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생길 즈음, 갑자기 끼이이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효성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열리는 문틈으로 하얀 빛이 효성에게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문은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지만, 효성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로 열리고는 멈춘다.

‘이 문 밖에 김보좌관 하고 기사가 있는가? 도대체 이게 뭐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조심스럽게 문 가까이 다가가면서 생각하던 효성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만다. 

“너무 눈이 부셔.”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겠지... 이 곳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곳이야. 만약 이런 곳이 있었다면 분명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 보았을거야.’

눈이 부시다고 말하면서 머리 속에는 효성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부정한다. 70여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효성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사이에 문의 왼쪽에 있는 검은 색 벽에서 하얀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에서도 빛이 새어 나왔지만, 문 앞을 바라보고 있던 효성은 옆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작은 구멍에서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보이더니 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불쑥!

“흠흠!”

효성은 자신의 옆 쪽에서 들리는 기척에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에~~! 이건 또 뭐야?”

효성의 눈 앞에는 하얀 피부의 얼굴에 큰 눈과 들창코를 가진 소년 한 명이 서 있는 것이다.

 

착 달라붙은 검은색 타이즈, 주황색 헐렁한 셔츠를 무릎 위까지 내려 입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돼지처럼 접힌 양쪽 귀 사이로 삐에로가 쓰는 고깔모자를 얹어 두었다. 허리에는 흰색 벨트를 하고 있었다. 발에는 초록색으로 끝이 뾰족하게 돼지꼬리처럼 말려 올라간 신을 신고 있어 효성의 눈에는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효성의 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소년은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놀라지마. 괜찮아. 안심해. 하하하....”

소년의 말에 불쾌감을 느낀 효성이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괴이하게 생긴 돼지새끼가 어른도 몰라보고 반말을 지껄이다니....”

효성의 말에 돼지를 닮은 소년이 혀를 찬다.

“뭐? 괴이하다고, 돼지새끼라고?.... 쯧쯧쯧!”

그리고 이내 셔츠를 펄럭거리며 발걸음을 옮겨 효성에게 바짝 다가오며 이죽거린다. 


“네 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난 더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네 녀석이 이승에서 지은 죄가 무겁다 보니,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거야.”

소년의 이죽거림에 효성이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뭐라고 내가 이... 이승에서 지은 죄라니... 그 죄가 무겁다니....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효성은 더듬거리며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나 소년은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가볍게 했다. 

“하하하.. 너 십이간지 알지? 십이간지 중 마지막을 상징하는 동물이 뭔지도 알잖아.”

소년은 폴짝 폴짝 뛰면서 효성의 주위를 돌면서 말을 이어간다. 그런 소년의 모습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이 곳은 사후세계야. 다시 말하면 한효성, 니 녀석이 죽어서 온 곳이야.”

“뭐... 뭐라? 내가 죽었다고?”

효성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응! 조금 전 사고로 넌 죽었어. 죽었으니 이 곳으로 온 거야. 이 곳은 죽은자들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곳이야.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거치는 곳. 바로 사후 세계야.”

소년은 방긋 웃으며 효성을 흘낏 바라보았다. 

소년의 웃음은 누구나 다 이 곳에 오면 놀라거나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 사실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했다. 


효성은 주름진 눈으로 자신의 온 몸을 훑어보고, 자신의 몸을 세게 꼬집어본다. 

아팠다. 

“아니야. 난 죽지 않았어. 이렇게 아픔도 느끼고, 내 몸을 만질 수도 있고, 잘 보이는 걸.”

“물론 그럴거야. 아직은. 너의 육신이 현재까지는 영혼에 붙어 있으니깐. 그러나 곧 너의 자손들이 니 몸을 화장하고 나면 만질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픔은 느껴.... 그것은 이 곳 사후세계의 규칙이야. ”

“그.....그럴수가...”

효성이 말을 더듬었지만, 소년은 그런 효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간다. 

“자! 설명은 이쯤이면 됐고, 니가 나를 이렇게 돼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근거들을 좀 살펴볼까?”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딱 치자, 효성의 눈 앞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소년은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화면에는 효성이 살아온 삶이 주르륵 영화 필름처럼 흘러갔다. 마치 아래로 내리꽂히는 폭포수처럼 빠르게 지나가서 미처 효성은 제대로 살펴볼 수 조차 없었다. 효성이 살아왔던 70여년의 시간들이 아주 짧은 순간 흘러갔고, 효성의 눈에 익은 장면을 마지막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멈춰 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 장면은 조금 전 구두를 벗어 뒷 굽으로 블랙다이아몬드를 캐내려고 벽을 치던 효성 자신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이 정지하자 한쪽만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효성의 눈 앞에 있던 화면은 이내 사라졌다. 


소년은 작은 입을 열어 말했다. 

“넌 참! 탐욕스럽구나. 살아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죽은 직후에도 그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이 세계의 물건들을 탐내다니 말야. 보통의 인간들은 이 세계의 물건은 탐하지 않는데, 넌 정말 대단해.....”

효성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자! 어디보자.... 음! 너가 살아오면서 지은 죄는 총 15만4천6백가지구나. 대충만 봐도 엄청나네. 100만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너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니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나쁜 짓들을 했구나. 연약한 아녀자를 속이고, 울리고, 노파를 비난하고, 아이 마저 속이고, 부실한 공사를 해서 입주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남의 것을 빼앗고, 속이고, 무엇보다도 권력을 이용해서 하지 않아도 될 공사를 해서 너와 니 주변의 부만 챙겼어. 그리고 오직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도와주지 않고, 방해만 했군 그래. 그런 수많은 죄들이 나를 십이간지 중 돼지로 나타나게 만들었네.”

소년은 마치 모터가 달린 입을 가진 것처럼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나는 인간들이 생전에 지은 죄의 크기만큼 십이간지의 동물 모습으로 나타나지. 지은 죄가 제일 작으면 쥐의 모습으로...... 지은 죄가 엄청 크면 돼지의 모습으로... 뭐 죄에 따라서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동물들의 모습도 나타날 수 있지. 넌 나를 돼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했으니, 굳이 너의 죄를 살펴보지 않아도 그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은 알 수 있지. 하지만 이를 알려줘야 하는 것도 내 역할이니.... 자! 설명을 들었으니 지금까지 내가 열거한 죄들을 모두 인정할 수 있지?”

효성은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했을 따름이야. 그리고 큰일을 위해서 작은 것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거야. 그건 내 잘 못이 아니란 말야.”

효성의 말에 소년이 대답했다.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니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아까 열거한 죄는 모두 너의 것이야. 너희가 생전에 지은 죄는 권력으로 묻혀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그리고 법적인 공소시효가 지났다해서....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죽은 후에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는거지. 그래서 너희들도 말하잖아. 살아 있을 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한번뿐인 너희들의 삶인데 말야. 그리고 지금 와서 착하게 살지 않는 걸 후회할 필요도 없어.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고 용서를 빌라고도 하지 않아. 이 곳에서 너의 판단, 의견, 생각들은 중요하지 않거든. 오직 너희들이 살아생전 만들어낸 죄의 결과만을 볼 뿐이야. 과정은 인간들 세상에서나 중요할 뿐.”

말을 마친 소년은 잠시 침묵하면서 눈을 굴려 효성을 바라보았다.


효성이 반박하듯이 묻는다.

“그럼 넌 뭐야? 니가 염라대왕이야?”

효성의 물음에 소년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한번 탁 치고는 말했다.

“아! 본연에 충실하다보니 내 소개 하는 것을 잊었네. 안녕! 난 사후세계의 안내자야. 이곳에 니가 말하는 염라대왕은 없어. 나랑 10여명의 친구들 뿐이야. 아마 곧 그들 중 일부를 만나게 될거야. 자! 그럼 판결을 내릴게.”

“무슨 판결? 대한민국 국회의원 한효성이 판결을 받아야 해? 난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법률제정기관이야. 나에게는 면책 특권이 있어...”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건 니가 살아있어야만 해. 지금 넌 죽었기 때문에 그런 인간의 기준은 적용되지 않아.”

소년의 말을 끝내면서 오른쪽 손가락을 딱딱 부딪친다. 


그 순간 효성은 자신이 이 곳에 오게 된 이유가 생각났다.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이 소유한 땅과 건물에 살던 사람들을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쫒아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하던 사람들을 피해 이동 중, 브레이크 고장으로 중앙선을 침범한 큰 트럭에 부딪히고, 생을 마감한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에 나타났다.

순간 효성은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올라올 즈음, 소년의 흠흠!거리는 소리에 억울함을 가라앉혀야 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 그럼 판결을 내릴게. 한효성. 넌 환생이야.”

순간 효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죄를 많이 짓고 죽었다는 자신에게 지옥으로 가라는 형벌이 내려질 줄 알았는데, 환생이라니......  

“네!! 환생이라구요?”

은근히 치밀어 오르던 억울함도 사라지고, 놀라게 된 효성은 지금까지 안하던 높임말까지 썼다. 

소년은 돼지처럼 접힌 귀를 한번 들썩거리기만 할 뿐 효성의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앗! 차 마시러 갈 시간이 다 됐군. 만나면 설레는 친구와의 약속이야. 자! 그럼. 환생으로 가는 길은 조금 전 열린 그 문이야. 그 안으로 들어가면 돼. 계단이 나올 건데,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계단을 골라서 올라가. 너는 죄가 많아서 올라가야 하거든. 죄가 적은 사람은 내려가기도 하지만. 넌 올라가야 해. 내려가면 안 돼. 명심해. 그럼... 잘 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소년은 가볍게 웃으며 자신이 왔던 작은 구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효성은 소년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니 힘들게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내려갈 수도 있단 말이잖아. 그리고 환생한다니... 하하하....’

효성은 속으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웃음소리에 기괴한 꼬맹이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환생시키지 않고 지옥으로 보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살아있을 때 누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나이가 드니 교활함만 늘었군.’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도 들었다.

‘뭐 어때. 어차피 안내자가 나한테 환생이라고 했잖아.’

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는 문 안으로 한 걸음 옮기려던 효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소년이 남긴 말도 생각났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사후세계라고 했고, 생전의 삶에 대한 평가가 아주 짧은 순간에 이뤄졌다, 그리고 환생으로 결정 난 것에 대해,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사후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들, 수없이 들어왔던 사후세계에 대한 옛날 얘기들, 종교적 교리에서 들었던 그런 천국이 아님을 알게 되자,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살다가 죽으면 잠시 평가 받고, 지은죄가 있든 없든, 그냥 환생이라니... 별거 아니잖아.’


머뭇거림도 잠시, 환생이라는데.... 어서 가자. 라는 생각이 든 효성은 성큼 성큼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뽀얀 우윳빛이 효성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뽀얀 우윳빛 공간은 하얀 공간으로 변하면서 드넓게 펼쳐진다. 그리고 이내 무수히 많은 다양한 형태의 계단들도 발견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눈앞에는 끝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들... 그리고 반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들....


효성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계단들을 살펴보았다. 100여명이 일렬로 한꺼번에 가도 거뜬한 넓이의 계단,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이 좁은 계단, 계단 옆이 막혀서 옆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없는 계단, 혹은 계단 옆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이 있는 계단(자칫 발을 잘 못 디디면 그대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무로 만든 계단, 돌로 만든 계단, 쇠로 만든 계단, 뭉실뭉실 구름 같은 계단, 낡아서 곧 끊어질 것 같은 계단, 돌돌 말려있는 나선계단, 지그재그처럼 내려갔다 올라 갔다를 반복하는 계단, 징검다리처럼 껑충껑충 뛰어야 건널 수 있는 계단, 중간 중간에 계단참이 있는 계단, 쉴만한 계단참 없이 끝없이 내려가기만 해야 하는 계단 등 수많은 계단들이 효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효성의 눈앞에 작은 화면이 뜬다.

[당신은 반드시 올라가는 계단 중 원하는 계단으로 가셔야 합니다.]

효성은 어디로 갈까 고민한다.

좀 전에 사라진 화면에서 반드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라고 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100여명이 내려가도 거뜬한 넓은 계단을 선택하자. 저 계단이라면 옆으로 떨어질 염려도 없고, 낡아서 곧 끊어지지도 않는 튼튼한 돌계단이잖아. 비록 중간에 계단참이 없어도 계속 내려가면 될거야.’

그렇게 효성은 자신이 선택한 계단으로 서너 발 내딛는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였던 무수히 많은 계단들이 사라지고, 오직 그가 걷는 계단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참을 내려가면서 효성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생각한다. 

‘거봐! 내려가니깐 몸도 덜 힘들고 수월하고 좋잖아. 얼마나 내려가야 할지 몰라 조금 지루하지만 말야.’


단조로워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하면서 다시 한참을 내려가던 효성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아. 이 계단!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이 변하네.’

효성의 의문은 서서히 사실로 나타났다.

안내자의 제안을 듣지 않고 내려가는 계단을 선택했던 효성은 그제야 이 곳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도 주어진 명대로 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완만한 계단은 잠시 후 가파르게 바뀌어갔다. 그리고 그 계단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는 효성이 보였다. 

효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난 꿈을 꾸고 있는 걸 거야. 이렇게 심장도 두근거리고, 땀도 나고 그런 걸 보니...’

그 생각이 들자, 위로 올라가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좀 더 힘을 내자. 환생이든, 아침에 눈을 뜨든... 난 아직도 숨 쉬고 살아있는거야. 그리고 환생이라면 다시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거잖아.’


하얀 공간의 넓은 계단은 단조롭고 밋밋한 반복들이 걷는 이로 하여금 지겹게 만들고 있다.  

가파르던 계단은 조금 완만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오르는 효성은 지루해져서 하품이 났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효성의 손목에 있던 최고급 손목시계의 시계바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단의 폭은 점점 줄어들어, 한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다. 몇 발을 내딛자, 효성의 앞 쪽에서 험악하게 생긴 거대한 얼굴이 풍선처럼 둥실 떠내려 왔다.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새빨간 색으로 빛이 났으며, 콩알만한 사마귀 같은 것들이 온 얼굴을 뒤덮고 있어 더욱 흉측해 보였다. 커다란 콧구멍은 효성의 백발머리가 들어갈 정도로 컸으며, 입술은 두텁고, 날름거리는 혀는 새파랬다. 

두터운 입술이 벌어지면서 새파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얼굴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넌! 죽기 전까지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이 장면을 보아라. 너의 죽음에 저주를 퍼붓는 자들이 저리도 많구나.”

새빨간 얼굴은 자신의 매서운 눈으로 빛을 쏘아 효성의 눈앞에 비추었다. 


[[장례식장.

수많은 조화들이 장례식장을 메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틈으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효성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발견했다. 

꽃들 사이로 자신이 웃고 있는 사진을 본 것이다.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조문객들을 만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례식장은 대체로 시끌벅적했다. 자신이 소속되었던 당의 사람들이 얼굴을 비추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효성은 슬쩍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럼 예의상 와야지...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때 장례식장 입구가 술렁이더니 십 여명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한효성! 나쁜 새*! 재개발지역이라며 우리를 몰아내더니 너도 오래 살지는 못하는구나. 하하하.”

“욕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지옥에나 가 버려라.”

“비리의원 한효성 놈. 벌도 받지 않고 죽다니... 에잇 퉤. 저승에서 죗값을 달게 받아라.”

장례식장은 점점 어두워지면서 그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한효성은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환생 결정이 내려졌기에.

새빨간 얼굴은 다른 빛을 비추었다.

[1주일 전 사망한 전 **당 소속 국회의원 한효성 의원이 회장으로 재직 중이던 국민건설이 최종 부도를 맞았습니다. 한의원은 4년 전부터 무차별적으로 해외자원에 투자하였지만, 모두 부실한 해외 투자로 일관하였으며, 이는 국민건설 뿐만 아니라 국가 예산에도 손실을 주었으며 한의원의 비자금도 발견되었습니다. 비자금의 규모는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의원은 의정활동비를 이중 청구하여 5천만원 이상의 부당이득을 냈다는 제보가 들어가 현재 검찰에서 조사 중에 있습니다.]

뉴스 아나운서의 무미건조한 듯한 목소리와 달리 효성의 낯빛은 수없이 변해갔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효성은 자신의 재산이 아들과 그 자손들에게 이어져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뉴스에 그는 실망의 빛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고 한효성 의원의 사망 이후 그의 자녀들과 한효성 의원의 동생인 한진성 국민증권 회장과의 유산 다툼으로 인해 현재 법정 소송까지 예고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 내가. 내가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효성이 분노에 찬 눈을 들었을 때, 새빨간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효성은 한참을 식식거리다가 이끌리듯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오직 걷고 싶지 않은 계단이었지만, 그의 몸은 자석에 이끌리듯 아니 누군가 자신을 불러서 걸음이 자연스럽게 향하듯 발걸음이 옮겨졌다. 그렇게 몇 걸음 걷는 동안 조금 전에 보았던 재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하얗게 불태운 듯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그가 아둥바둥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협박하고, 위협하고, 아부해서 거둬들인 재산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아무 부질없는 공(空)인 것처럼.


계단을 오르다가 여러 가지 얼굴들을 만났다. 검은색의 얼굴은 효성의 주변에서 아부하던 사람들을 보여준다. 

온통 하얀 얼굴이어서 오직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검은 눈동자 뿐인 얼굴은 화목하지 않고, 오직 이기심들만 가득한 효성의 가족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대체 저것이 얼굴인지 알수 없는 살점이 덜렁 덜렁 떨어지는 흉측한 해골같은 얼굴은 효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등쳐먹고, 선거 때는 허리굽혀 인사하다가 선거가 끝나자 찾아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하고,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자들을 비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심술궂은 표정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나타나 효성의 젊은시절 잘 못한 일들, 부모를 속이고, 동생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타난 몇 개의 얼굴들은 효성이 살아생전 저질렀던 죄과들을 그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효성은 분노하다가, 괴로워하다가 어느덧 머리 속에서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사라져감을 느낀다. .

계단을 오르면서 점점 전생의 기억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갔다. 


다시 수백걸음을 걸어 계단을 오르던 중 이번에는 효성의 눈앞에 노란 얼굴이 둥근 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이번 얼굴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얼굴들과는 달리 험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점점 기억이 사라지고, 생전의 기억이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효성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효성은 노란 얼굴에게 불쑥 질문을 했다. 

“이번엔 뭘 보여주려고 나타났나? 웃고 있는 걸 보니, 그래도 내게 좋은 일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가?”

노란 둥근 달 같은 얼굴은 찢어진 입꼬리를 더욱 크게 올려 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냉소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하고, 미소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웃음이다. 그리고 말없이 눈에서 빛을 쏘아 효성의 눈 앞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효성은 영상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를 넋을 놓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이 이어지는 동안, 효성은 마지막 남은 기억이 생각난 듯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어머니.. 제가 잘 못 했습니다. 정말 잘 못 했습니다. 어머니.. 흑흑흑”

효성의 눈에 비춰진 영상에는 사방이 검고 막혀 있는 공간에 오래된 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는 모습이었다. 그 나무 위로 하얀 빛이 한줄기 비추고 있다. 나무는 앙상하고 가지도 오래된 듯 가늘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몇 남지 않은 잎들은 앙상한 가지에 붙어 숨결에도 떨어질 것 같이 파리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부러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비집고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효성은 눈을 굴려 나무를 훑어본다. 그리고 나무에서 마치 부조처럼 붙어 있는 늙고 지쳐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찾아낸다. 이 메마른 입술이 들썩거리며 노래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된다.  

효성은 나무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귀 기울이다 나무에 박혀 있는 여인의 얼굴이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어머니를 보자 그리움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노래가사를 이해한 효성은 그 노래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잊고 있었던 가락과 가사말. 

동시에 잊고 있었던 기억들도 떠 오른다.


10여년 전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 당시 자신은 선거 유세로 바쁘다는 핑계로 요양병원에 모신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다. 아니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아픈 노모로 인해 자신의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싫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방치하고 찾아뵙지 않던 어머니는 병원에서 쓸쓸히 임종을 맞이했다.   

어머니의 기억은 콘크리트처럼 두꺼운 효성의 심장마저도 아프게 했는지, 효성은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입술을 애써 깨물었지만, 주름진 효성의 두 눈에는 눈물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효성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옛 기억이 눈 앞에 보여지는 것처럼 떠올랐다. 

어린 시절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초가집에서 밥을 짓고 있는 젊은 날의 어머니, 그리고 그 모습을 강보에 쌓인 똘망똘망한 눈알을 굴리며 바라보던 아이. 바로 효성 그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린 듯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효성이 사후세계에 도착해 처음 보았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자장가 노래소리. 


어머니가 중얼거리듯 부르는 노래는 그녀가 당신의 아들인 효성을 위해 개사하여 만든 자장가였던 것이다. 

[자장, 자장 우리 효성이, 잘도 잔다.

 우리 효성이, 이 밥 먹고 어여 어여 커서 훌륭한 사람 되고.

 자장 자장, 우리 효성이. 어여 어여 커서 착한 사람 되고

 우리 효성이. 남을 도울 줄 아는 욕심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자장, 자장, 우리 효성이. 잘도 잔다. 잘도 잔다.”] 

어머니의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는 효성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릴 때 잠이 오지 않으면 늘 불러주던 그 노래는 이제 오래된 늙은 나무에 부조처럼 박혀 있는 얼굴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 

노란 얼굴은 효성이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잠시 기억하던 옛 기억을 다시 되살려주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함께 떠오르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효성이 잘 되길 바라던 그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도 기억하자, 어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욕심에 파묻혀 살던 그가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흑흑흑! 어머니...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아직도 그러고 계십니까? 어..어머니는 환생하지 못하신건가요?”

그의 울음 섞인 혼잣말 같은 질문에 노란 달의 얼굴은 찢어진 한쪽 입꼬리를 더욱 높이 올리더니 냉소를 지으면서 침묵의 공간 속으로 스르르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울고 있는 효성은 노란 얼굴의 냉소를 볼 수 없었다. 



한참을 울던 효성이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 일어났다. 

효성은 계단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높이 높이 올라가던 계단은 사라지고,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계단이 광장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린 순간 효성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울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오던 계단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광장의 멀지않은 한쪽 끝에는 온통 하얀색 벽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벽에는 노란색으로 된 문이 높이 솟아 있었다. 

효성은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노란색 문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 앞에 도착한 효성은 더 이상 효성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작은 몸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노란색 문 옆에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

불쑥!


“하하하! 안녕하세요. 저는 사계(死界)에서의 마지막 안내자입니다.”

튀어나온 안내자는 돼지꼬리처럼 말린 짧은 꼬리와 원숭이 얼굴에 여전히 돼지코를 한 귀여운 소녀다. 그녀는 아주 유쾌한 목소리로 작은 아이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사계(死界)의 여행을 하느라 수고하셨어요. 당신은 안내자의 말을 듣지 않고, 올라가는 계단 대신 내려가는 계단을 선택했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주었던 영상에서도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결국 반성도 마지막에 단 한번 밖에 하지 않으셨군요. 마지막 관문에서 어머니를 기억하고 흘린 눈물과 그나마 내뱉은 반성의 말로 인해 당신의 죄는 돼지에서 원숭이 얼굴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원숭이와 돼지의 중간단계로 나올 수 있었네요. 하하. 아주 쬐끔 죄사함이 되긴 했네요. 아마 이렇게 제가 변하게 된 것은 죽어서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하는 당신의 어머니의 간원 때문일 거에요. 당신은 거의 반성하지 않았으니.”


침을 한번 삼킨 소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구의 깊은 밀림에 사는 작은 쥐로 환생합니다. 그 곳에서 살다가 독수리에게 잡혀 먹힐 운명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저 문을 통과하게 되면 당신은 전생의 기억, 그리고 사계에서의 기억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 안녕!.”

소녀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노란색 문이 서서히 열린다. 

그리고 전생의 효성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어디론가 날아간다. 

쓰으으으윽!

이후 문은 다시 굳게 닫히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소녀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나왔던 구멍 속으로 사라졌고, 구멍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하얀 벽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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