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글쓰기

봄이

김예문은 종2품 이조참판의 직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선비의 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맡은 직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왕에 충성스러우나 권력에는 큰 욕심이 없어, 나이가 많은 그는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치사하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예문에게는 늘그막에 가진 여식이 하나 있었다. ‘연서라 이름 지은 아이는 그 아비를 닮아 인품이 곧고 소박하며 매우 겸손하였다. 미모가 출중하여 김참판네 외동딸이라 하믄 사람들이 궁금해 하였으나 그 소문이 도성에 만연할 정도의 특출난 가인은 아니었다. 사실 그정도의 설부화용이라 함은 흔한 편이라 그녀의 시종인 봄이도 빼어난 미모라 볼 수 있었다.

세종 9, 정세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백성을 위한 용의 뜻이 이르러 국세엔 평온이 찾아들었다. ‘산세에 구름이 걷히고 벽도화 만개하니 이곳이 만연한 요지라.’ 민생에 봄이 드니 궐내에는 곧 명으로 갈 공녀를 다시 색출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였다.

 

참판 김예문은 용안을 뵙고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참판의 직을 지내며 어명을 받아 직접 알현할 일이 극히 드물었던 그였기에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은 그를 수심에 잠기게 하였다.

참판의 여식이 화용월태의 가인이라 하던데.’

다녀오셨습니까 대감나으리.”

대문을 지나는 김예문을 발견한 시종들의 인사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그 중 봄이를 본 김예문이 지나던 발길처럼 말을 툭 던진다.

봄이 네가 올해 몇이 되지?”

열넷되옵니다, 대감나으리.”

그렇구나.”

김예문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고뇌에 차 도무지 침소에 들 수가 없었던 김예문은 공조참판 이정필을 불러 월주를 기울였다. 이정필 또한 공녀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분위기를 잘 알고있었기에 묻지 않고도 김예문의 근심을 직감하였다. 이미 한두해의 이야기가 아닌지라 이정필 역시 몇 해 전 김예문을 불러 며칠 밤을 술로 지새다 결국 그의 여식은 일찍이 혼인을 시켜 출가했기 때문이다.

빼어난 처녀는 예외없이라니 빼어난 인견은 예외없이로 들리는구만.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차를 낼 아이, 찬을 낼 아이 구분해서 데려간다지 뭔가. 이러다간 명의 국경으로 세울 아이도 조선에서 데려가겠구만! 이거 참.”

김예문은 낮에 있었던 일을 골돌히 생각하다가 그도 모르게 나지막히 읊조렸다.

봄이가 열넷이라지..”

봄이는 연서의 수발을 드는 아이가 아닌가?”

“....”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달 밑에 둘의 대화가 봄바람에 흩어지고 적막이 흐른다. 이정필은 바람이 궁으로 불어 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에 김예문의 다음 말을 잘라버렸다.

이 사람이, 송장치를 일 있나!”

답답해서 해본 말일세, 그저 답답해서.”

허허 글쟁이인줄 알았더니 이 친구, 농이 짖구만.”

누군가 듣고있기라도 한 듯 이정필은 말을 얼버무리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김예문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다시 사색에 잠길 뿐이었다.

 

해가 뜨기 무섭게 김예문은 봄이를 조용히 불렀다. 집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종의 딸이라 행실에 부족함이 많을 것이라 예측했던 것과는 다르게 봄이는 연서의 자매처럼 자태에 곧음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네가 연서를 잘 따른다지.”

아가씨께서 잘 대해주십니다.”

품행이 고르고 바른 것이 네 출신을 믿기 힘들게 하는구나.”

어깨너머로 배우고 흉내내는 것 뿐입니다. 저같이 미천한 것에게.. 과찬이십니다.”

노비의 신분이라 믿을 수 없을 태도에 김예문은 이 이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선비로서의 마지막 끈을 놓고야 말았다.

봄아, 네가 원한다면 더 넓은 세상에서 직접 공부해 볼 수 있도록 힘써줄 수 있다.”

대감나으리.. 어찌 제가..”

김예문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연서를 잘 보필하여 준 것에 대한 감사니 괘념치 말거라.”

대감나으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흑흑

봄이의 울음은 분명 과분한 처사에 대한 감사와 신분을 넘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흥분이 담긴 것이었겠으나 김예문에게 그것은 비수가 되어 그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오히려 그 울음을 혹여나 누군가가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자신의 모습이 추악한 울음을 포효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오후, 수발을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라 표하며 준비한 비단과 각종 장신구들을 보며 봄이는 기분이 날아가는 듯 했다. 그런 봄이를 보는 연서도 마치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이 들어 흐뭇하고 또 아버지의 넓은 아량을 본받아야겠다고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나비처럼 마당을 총총 뛰는 아이와 그 곁에서 봄이의 애비되는 자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김예문은 죄책감에 차마 쳐다보지 못한다. 흘긋 나비같은 봄의 짚신을 본다.

명으로 가는 길은 춥고 험난하다지.’

김예문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봄이의 애비에게 말한다.

그렇게 감사할 것 없다. 봄이 데려다 꽃신이라도 하나 신겨오거라.”

꽃신을 신은 봄이가 아직 녹지 않은 북쪽의 설산을 걸어가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는다.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외는 봄이 애비의 인사가 설산의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댓글(3)

  • jangho10****
    29 Apr 2019
    봄날은 간다 봄이가 간다 ㅋㅋㅋㅋ 봄이 다시 돌아온다면 봄날은 온다일까요 흠 ㅎㅎㅎㅎ 과연 그렇게 가는 봄이는 행복할까요
    등록하기
  • az
    28 Apr 2019
    봄이 가지마 ㅜ
    등록하기
  • BAN
    28 Apr 2019
    최근 글쓰기 중에 가장 힘들게 썼습니다. 이미 시작 전부터 너무 기운을 많이 빼서 초고 후 한번도 퇴고하지 못한 날 것 그대로를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