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읽고, 함께 쓰기

우아하고 고매한 빈센트

 '쓸모인류'

제목을 보고 인간의 쓸모를 탐구하는 철학책쯤 되겠거니 싶던것이

두어 장 읽다보니 소설인줄 알았는데,


 에세이였다.


 기본적으로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단편적인 결론과 해답에 회의적인 편이기도 하고,

연구와 통계자료 없이 알려주는 주관적인 삶의 지혜들에 신뢰를 느낄 수 없어서이다.


 썩 개의치 않은 마음으로 읽어내려갔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록 빈센트 이 사람 참 흥미로웠다.

물론 내가 에세이를 대하는 태도처럼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공감되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를 통해 얻은 것은 있었다.

책을 통해 그를 관찰하며,

그에게서 공감한것과 공감하지 못한것을 구분해서 몇가지만 써내려 보려한다.





[공감]


그는 사소한 물건 부터 특정 공간 까지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한다.

모든 것이 규격화 되어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확실히 특별함을 부여한다.

수 많은 단어와 문장으로 정의 내리던 무언가를 함축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그의 자세가 담겨있다.



그는 자신만의 공간을 통해, 그만의 시시덕거리는 관계를 만들어냈다.

 모든 이가 드나드는 제 3의 공간을 통해,

모든 이가 자유롭게 와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유롭게 돌아간다.

그의 말로 일컫자면 소위 시시덕 거리다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이다.

관계로 인해 유지 되는 만남이 아닌, 행위로 인해 유지 되는 관계.

내가 최근 가장 중시하게 된 삶의 자세를 만나서 반가웠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식이다.  

누군가와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모임이 지속적으로 계속 되기 위해,

용건은 없지만 의무적으로 계를 하고 돈을 모은다.

그 후 모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모이겠냐며 끝장을 본다.

비틀 비틀 집으로 돌아와 우리 관계는 계속 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으며 잠들고,

다음날 만난 동료에게 말한다.

"우리 어제 같이 술마신 사이지?"

그리고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만의 네트워크에서 서서히 배제되는,

서로가 기를 쓰고 버티며 어깨동무를 하는 그런 소모적인 관계 중시형 관계.


빈센트는 그런 관계의 불필요한 기름기를 깔끔하게 벗겨내고

시시덕거림을 통해 누구보다 담백하게 관계의 알싸함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그만의 오마카세를 가지고 있다.

그만의 오마카세는 그만의 시시덕 거리는 공간에서 내어주는 모닝 커피와 못난이 빵이다.

누구든 그 공간에서 그가 만든 못난이 빵과 커피를 먹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그는 그만의 오마카세를 만들어 냈다.

나의 오마카세는 무엇일까

요리이건, 대화에 쓰이는 문구이건, 누군가 나에게 나만의 오마카세는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자신있게 내어놓을 수 있는 나만의 오마카세는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공감]


 그는 무엇하나 소홀하지 않지만, 무엇 하나 집착하지 않는다.

가장 인상적이고 멋지다고 생각되는 그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면서도,
상당히 아이러니하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이 보이는 부분이였다.
우선 그는 모든 것을 오래 사용하는 것을 높은 가치로 두고 있다.
그런데 그는 집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집을 소유하는데 집착하면 그 집을 소유하는 비용을 치르느라 다 같이 주눅들어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고집으로 인해 그는 산타모니카 해변의 집을 장기 렌트로 30년을 거주했다.
30년을 렌트로 거주하면 집을 소유하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심지어 그는 그만한 비용을 치르고도 그는 서울에 있는 한옥집을 또 구할 수 있었다.
과연 대다수의 독자들이 산타모니카 해변의 집을 30년간 장기렌트로 꼬박 월세를 치르고 난 뒤,
또 서울에 있는 한옥집을 구할 수 있을까?
한옥집은 커녕 30년 동안 날아간 어마어마한 월세비를 후회하며
은퇴 후에도 자기 집 한채 얻지 못하고 더 작아진 집의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아파트 경비실의 문을 두드려야 할것이다. 

그는 집을 소유하는 것을 마치 명품백을 사는 것 처럼 자본주의의 탐욕에 찌든 사람들의 사치 행위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정의는 '소유'를 하건 '거주'를 하건 상관 없이 그 돈 정도는 없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한옥을 다시 구할 수 있는 그이기에 가능한 소위 "재력가의 고매한 취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냐고 묻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처럼 말이다.

또한, 그는 100년을 살 각오로 집을 리모델링 하며 대충 살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집을 소유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 소유가 아닌 집에서는 벽에못뚫기는 커녕 벽지 하나 바꾸지 못하는 현재의 주거 상황에서
차라리 소설이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그의 이상적이고 이국적인 마인드는 나로서는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다.
빈센트처럼 진정 공간을 사용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큰 맘 먹고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 쓸모있는 공간을 만들게 된다면?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나는 계속 그 집에서 같은 월세를 내며 살 수 있을까?
리모델링한 집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집주인은 새로운 입주자를 찾을게 뻔하다.

소유 대신 거주를 미덕으로 삼지만, 소유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의 아이러니한 로망은 지켜볼 수록 소설같고,
현실성과 합리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낭만으로 보였다.
아, 빈센트. 당신의 고매하고 귀족적인 취향을 실행하지 못하고 바라만보는 나는 더 초라해집니다.
에세이에 대한 회의감이 또 하나의 확신을 쌓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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